우리활쏘기 역사
페이지 정보
본문
1. 고대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활의 민족으로 불렸다. 이웃 중국은 무예의 중심이 창이었고 일본은 칼이었다면 우리는 활이 그 중심에 있었다.
실학자 이수광이 쓴 지봉유설(芝峰類說)에 보면 중국 사람들이 우리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네 가지가 있다는 대목이 나온다. 바로 부녀의 수절, 장례와 제사, 맹인 점치는 재주, 그리고 무사의 활 쏘는 솜씨다.
중국대륙을 지배한 한족은 그들의 땅을 중원(中原)이라고 높이고 남방족은 남만(南蠻), 북방족은 북적(北狄), 서방족은 서융(西戎)이라고 낮춰 불렀다. 동이(東夷)는 그들이 우리 민족을 지칭한 것이다. 그런데 夷자를 풀어보면 큰 대(大)와 활 궁(弓), 즉 대궁(大弓)이 된다. 이는 큰 활, 또는 활을 잘 쏘거나 잘 만드는 것을 일컫는 말이어서 우리 선조가 특히 활쏘기에 능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고조선의 영토는 지금의 만주 일대부터 한강 이북까지 광활한 지역에 걸쳐 있었고 고조선의 북쪽과 동쪽은 부여, 숙신, 옥저, 예맥 등이, 남쪽에는 마한, 진한, 변한의 삼한이 웅거하고 있었다.
중국의 고대사서를 보면 우리 고대민족의 궁시에 관한 대목이 자주 눈에 띈다. 위지동이전(魏志東夷傳)에는 ‘부여인들은 좋은 활을 만들고 활 쏘는 재주가 뛰어나다’는 대목이 있다. 여기서 부여는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압록강 두만강 송화강 유역, 즉 중국의 길림성과 함경남북도에 걸쳐있던 부족국가를 말한다. 위지동이전은 또 ‘부여는 궁시(弓矢)와 모(矛)로 병기를 삼으니 집집마다 갑옷과 무기가 있었다’라고 하여 궁시가 부여의 중요한 무기였음을 알려준다.
2. 삼국시대
고조선이 멸망하고 제후들이 패권을 다투는 전국시대로 접어들면서 고조선의 영토 대부분을 차지하며 북방의 강자로 떠오른 나라가 고구려다. 고구려는 중국 대륙과 크고 작은 충돌이 잦았고 이에 따라 상무정신 함양에 힘을 기울여 다양한 무기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무력충돌이 빈번하던 삼국시대에는 무(武)를 숭상하는 풍조가 더욱 짙어졌다. 이에 따라 궁술은 상무정신을 기르고 전투에선 적을 제압할 가장 강력한 수단으로 그 중요성이 더욱 커졌다.
삼국 가운데 활쏘기가 가장 성행했던 나라는 고구려였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수렵도는 말을 타고 맹수를 쫓아 달리며 시위를 당기는 무인들의 늠름한 모습을 보여준다. 고구려 시조인 동명왕(東明王)은 이름을 주몽(朱蒙)이라고 하였는데 주몽은 사실 활 잘 쏘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었다고 한다. 또 고구려 15대 미천왕은 하루에 사슴 40마리를 잡고 화살 한 대로 날아가는 기러기 두 마리를 꿰어 떨어뜨렸다는 얘기도 전해온다.
후주서(後周書)와 양서(梁書)는 ‘고구려의 병기는 갑옷과 쇠뇌와 궁전과 창 등이 있다’ ‘고구려 사람은 기력을 높이 숭상하여 궁시와 칼과 창을 능숙하게 다루며 갑옷이 있었고 전투에 능숙하다’라고 적고 있다.
백제(百濟)는 마한(馬韓)의 후신이며 역시 부여족(夫餘族)의 일파가 남하(南下)하여 세운 왕국이므로 궁술(弓術)의 발전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제21대 비류왕(比流王) 17년(320년)에 궁성 서쪽에 사대(射臺)를 세우고 매달 삭망(朔望)에 활을 쏘았다.」하였고 주서(周書)에 의하면 「병(兵:병기)은 궁전(弓箭)과 도(刀)와 삭(矟)이 있으며 기사(騎射)를 중요시 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이로 보아 백제(百濟) 역시 궁도(弓道)를 중히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신라는 쇠뇌(弩)의 제작에 능했고 성벽 위에 설치해 큰 나무토막 등을 쏘아 보내는 포노, 그리고 마차나 우차에 싣고 다니며 쏘는 차노도 있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보면 ‘진흥왕 19년 봄 2월에 나마신득이 포노를 만들어 바쳤는데 성위에 설치하였다’고 나와 있다. 신라 병부에 속한 관리 중에 노사지와 노당이 있는데 이는 쇠뇌에 관한 일을 관장하던 직책이었다. 신라의 쇠뇌 제작 기술이 워낙 뛰어났기에 문무왕 9년에는 당이 구진천 사찬을 초빙해 노 제작 기술을 배우려 한 일도 있었으나 그 비법을 전하지 않음으로써 후일 당과의 전쟁에서 쇠뇌를 앞세운 신라가 승리할 수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3. 고려시대
고려왕조도 활쏘기를 숭상하였다. 고려시대 군사편제 가운데 경궁(梗弓) 사궁(射弓) 정노(精弩) 강노(剛弩) 등은 활쏘기에 능한 병사들을 따로 뽑아 만든 궁술부대로 추측된다. 고려시대의 활은 동궁 세궁 장엄궁, 화살은 세전 유엽전 대우전 편전 등으로 과거에 비해 다양해졌다.
주목할 점은 고려시대에는 화살 재료로 버드나무 줄기를 많이 사용하였다는 점이다. 송나라 서긍(徐兢)의 고려도경을 보면 ‘활은 형태가 간략해서 탄궁과 같고 몸체 길이가 5자이며 화살은 대나무를 쓰지 않고 대부분 버드나무 줄기를 사용하는데 길이가 짧고 가늘다’고 나와 있다. 고려시대에는 호의 산지인 함경북도를 여진이 점령하고 있었기에 화살대 공급이 부족하여 버드나무 줄기로 대신한 것으로 보인다.
4. 조선시대
유교사회였던 조선시대는 문치주의를 지향하는 바람에 이전 시대에 비해 무예가 그리 강조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활쏘기는 무인들을 양성하는데 필수적인 과목이었다. 이에 따라 과거제도에 문과와 함께 무과가 병행되었으며 시취과목에는 궁술이 포함되어 있었다.
성종 19년 조선에 온 명나라 사신 동월(董越)은 견문록 조선부(朝鮮賦)에서 ‘조선이 귀히 여기는 것은 화피 활인데 크기는 다소 작지만 화살 보내는 힘이 매우 세다’고 했다. 이 화피 활은 각궁을 말하는 것으로 길이는 중국의 활보다 짧으나 힘은 강함을 인정한 것이다. 또 편전 같은 화살은 멀리 날아갈 뿐 아니라 적중률이 뛰어나므로 만주의 호인(胡人)들이 무척 두려워했다고 한다.
활은 조선시대 들어 더욱 다양하게 발전해 정량궁 예궁 목궁 철궁 철태궁 고 각궁 등 7가지를 사용했다. 그런데 현재까지 전해오는 활은 각궁 한 가지 뿐이다.
조선의 활은 중국 일본의 활에 비해 작았지만 그 성능은 훨씬 뛰어났다. 각궁의 경우 전투용과 습사용이 다르긴 하지만 대체로 100m에서 200m를 날아가는데 반해 중국 일본의 활은 사거리가 그 절반에 불과했다. 조선은 활이 주 병기였기 때문에 여러 가지 복합재료를 사용해 가볍고 작으면서도 멀리 날아가는 최첨단의 활을 개발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활의 생명은 탄력성에 있다. 중국 일본의 긴 활은 살을 매겼을 때 시위의 각도가 넓어서 탄성에너지가 화살에 미치는 힘이 약하기 때문에 사거리가 짧다. 반면 각궁은 탄력성을 높이기 위해 산뽕나무 참나무 대나무를 주재료로 하면서 안팎으로 물소뿔과 힘줄을 둘렀고 접착효과를 높이기 위해 민어 부레를, 방습 효과를 높이기 위해 화피를 사용했다. 각궁은 또 180도 뒤집어 쏘는 만곡궁이었기에 중국 일본의 일자궁보다 탄력이 뛰어날 수밖에 없었다.

